김유신'불쇼'로 김춘추의 발목을 잡다
햇빛 화창한 금성(경주)의 남산, 한창 꽃놀이를 즐기던 여왕이 측근들에게 다급히 물었다" 여봐라, 저기, 저게 무엇이냐?"모두들 여왕이 가리키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과연 산아래 멀리 인가가 드문드문 보이는 쪽에서 , 한 줄기 검은 연기가 하늘로 올라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꽤나 먼 곳이어서, 여왕이. 지적하기 전까지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김유신공이 저택이 있는 쪽에서 연기가 나고 있었다. 모처럼 상쾌한 기분으로 여왕과 함께 꽃놀이를 하던 신라 귀족과 화랑 들은 갑자기 벌어진 사태에 영문을 몰라 서로 수군거리고 있었다, 선덕여왕은 못 박힌 듯 그 자리에 서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쪽만 바라보고 있었다. 얼마 후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상황을 살피러 갔던 호위병이 돌와와서는 다급히 말에서 내려, 여왕 앞에 엎드렸다. "보고 드립니다. 김유신 공이 누이를 불태워 죽인다며 나무를 쌓아 놓고 불을 질렀습니다. "뭐라고? 대체 그 무슨 해괴한 소리더냐? 이유는 무엇인지 알아보았느냐? 김유신의 누이동생 문희가 처녀의 몸으로 아이를 가졌기 때문이라는 말에, 여왕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때 귀족들 사이에 서 있던 김춘추 앞에 여왕의 시선이 딱 멈췄다. 그녀가 쏘는 듯한 눈빛으로 쳐다보자, 처음에는 태연한 척하던 김춘추도 결국 낯을 붉히고 고개를 숙이는 수밖에 없었다. 김춘추는 사적으로 이모가 되는 여왕 앞에 고개를 푹 숙이고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김유신 공 댁의 불장난의 범인은 바로 김춘추였던 것이었다. 임신까지 시켜놓고 얼마나 모질게 굴었으면 김유신 공이 저리 하겠냐는 여왕의 꾸짖음에 고개를 들지 못하는 김춘추였다 진골 중의 으뜸인 자가 처신이 가소롭다 꾸짖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지른 불은 자신이 꺼야 하는 법이다 "빨리 가서 구하거라! 혹시라도 내가 늦어서 일이 잘못되는 날에는 용서하지 않겠다!"
꿈을 사서 왕비가 되다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꿈을 사서 왕비가 되다의 이야기다. 이는 `삼국유사`를 비롯한 세 가지 기록에 전해지는데 , 내용은 조금씩 다르다. `삼국사기`에는 '불에는 김춘추에게 장난' 이야기가 나오지 않으며, `화랑세기`에는 김춘추에게 김문희와의 결혼을 명령했을 당시 덕만은 아직 왕이 되기 전인 공주였다고 한다. 얼핏 보면 그냥 신라 시대의 한 일화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각 장면들을 하나씩 짚어보면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 드러난다. 우선 조금만 생각하면 김유신이 진심으로 누이를 죽이려 하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진심이었다면 백제의 계백이 처자를 죽일 때처럼 칼로 내리쳤거나, 자결하라며 비단 끈을 던져주거나 했을 것이다. 화형은 극심한 고통 속에 죽어가게 하는 것으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형 방식 중에서도 가장 잔인한 방식에 속한다. 아무리 화가 났기로 볏속에 자신의 조카까지 가진 누이동생을 불태워 죽인다? 또한 화형은 준비하는 데도 시간이 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요란한 볼거리를 제공하는 처형 방식이다. 굳이 불태워 죽인다며 법석을 떨고, 장작더미에 사람은 넣지 않은 채 불부터 피워 연기가 멀리 남산에서 보일 정도로 솟아오르게 할 필요가 있을까? '집안 망신'이라 누이를 죽인다는 것인데, 그런 망신을 동네방네 광고할 까닭은 없지 않을까/ 마치 "누구든 빨리 와서 말려주시오" 하는 것처럼. 그러면 왜 김유신은 굳이 그런 '쇼'를 해야 했을까? 김춘추를 우격다짐으로 결혼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 문희와 관계한 김춘추의 의사가 불투명했을 가능성이 떠오른다. 사실 김춘추는 이미 부인이 있었는데 '화랑세기'에는 김춘추가 부인 보량공주를 사랑했고 그녀가 임신 중이었기에 문희와의 결혼을 망설였다고 되어 있다. 하지만 단순한 남녀 간 애정 문제 이상의 정치적 이해관계도 있었을 법하다. 당시 신라 왕통은 성골이었고, 김춘추와 김유신은 그보다 한 단계 아래인 진골이었다, 그러나 진골이 된 연유는 전혀 달랐다. 김춘추는 할아버지인 진지왕이 황음무도하여 폐위되었기에 성골에서 진골로 강등되었고, 김유신은 신라에 항복한 가야의 왕실 핏줄로서 진골에 편입된 상태였다. 김춘추는 자신이 진골임이 불만스러웠고, 김유신은 신라에서 살아남고 성공하려면 진골 명함에 매달려야 했다. 피의 순수성을 따지는 신라 사회에서, 이미 ㅚ초의 화랑이라 불리는 설원랑의 손녀인 보량공주와 혼인해 성골 아닌 성골을 지향하던 김춘추에게 가짜 진골과 사돈이 되는 일은 그리 탐탁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김유신 가문이 갖춘 군사적인 실력(김유신의 할아버지 김 무력은 백제 성황을 살해하여 진흥왕의 한강 유역 제패에 큰 공을 세웠다)에 탐이 나 친분을 맺었을 것이다. 그러나 김유신으로서는 자신과 가문의 입지를 튼튼히 하기 위해 김춘추와 친구 이상의 사이가 되어야 한다고 여겼으리라.
선덕여왕에 허락을 받아 결혼을 성사시키다
선덕여왕이 남산에서 놀다가 우연히 멀리 떨어진 곳의 연기를 보고 그것을 지나치지 않고 끝까지 파헤쳐 진상을 드러낸다는 점은 어딘지 부자연스럽다. 뭔가 짜 맞춘 듯한 인상이 남는다. 또한 김춘추는 나중에 고구려, 일본, 당나라를 두루 다니며 목숨을 내놓고 외교를 펼친 사람이다. 호랑이 같은 연개소문이나 스스로 천하의 주인이라 여긴 당태종 앞에서도 조금도 위촉되지 않았던 외교의 달이니다. 그런데 그런 그가 단숨에 알아볼 만큼 낯빛이 달라졌다는 것도 이상하다. 나중에 후고구려의 공예가 관심법으로 사람의 마음을 께뚫어본다고 주장했던 것처럼, 불소동의 관계자가 누군지 아는 상태에서 김춘추를 지목하고 몰아가나, 김춘추로서도 어쩔 도리 없이 인정했던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김유신과 선덕여왕 사이에 미리 이야기가 있었고, 각본에 따라 김춘추를 압박했다는 것이 사건의 진상일 가능성이 크다. 선덕 여왕은 보수적인 구 귀족보다는 야심과 재능이 넘치는 신진 귀족들과 손을 잡고 싶었을 것이다. 문의 귀채 김춘추와 무의 천재 김유신은 최적의 파트너였는데, 다만 김춘추는 경우에 따라서는 오히려 적이 될 수도 있었다. 진골로 강등되기는 했지만 어떻게 보면 왕위 계승 서열이 오히려 자신보다도 앞섰기 때문이다. 따라서 두 사람이 손을 잡게 하고, 그 연대의 보증인이 자신임을 강조할 필요가 절실했다. 그것이 바로 '불장난'의 원인이었으리라. 김춘추의 입장에서는, 다소 불만스러웠을 김유신과의 처남-매부로서의 만남. 그러나 그 만남은 더할 나위 없는 만남이었다. 이후 30여 년간 김춘추는 문을, 김유신을 무를 담당해 삼국통일의 주역이 되었다. 김춘추는 진골 중에 최초로 왕위에 올라 태종무열왕이 되었고, 김유신은 신하 중에 가장 높은 지위인 태대각간에 올랐다. '불태워질 뻔했던' 문희의 아기, 김법민은 문무왕이 되어 통일을 완성했다.문무왕이 즉위하니, 이름은 법민이고 태종왕의 맏아들이다. 어머니는 문명왕후 김 씨로, 소판 서현의 막내딸이자 유신의 누이동생이다. 그녀의 언니가 꿈을 깨고 동생에게 꿈 이야기를 하니, 동생이 "내가 언니의 꿈을 사리라" 하고 는 꿈 값으로 비단치마를 주었다. 며칠 뒤, 유신이 춘추공과 함께 공놀이르 하다가 그만 춘추공의 옷고름을 밟아 떨어뜨리니 유신이 "마침 우리 집이 가까이 있으니 가서 옷고름을 답시다"라고 하였다. 이윽고 함께 집에 가서 술상을 차린 다음 조용히 보희를 불러 옷고름을 꿰매게 했는데, 보희는 겸사하며 나오지 않아 대신 동생 문희가 나와 옷고름을 달았다. 담백하게 화장하고 가볍게 차려입은 옷임에도 아름다움이 빛나니, 보는 이가 황홀하다. 춘추공이 이를 보고 기뻐하여 마침내 청혼했으니, 뒤에 혼례를 올리고 사내아이를 낳으니 이가 법민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상--
이처럼 개인이든 국가든, 당장의 입장이나 이해관계 때문에 보지 못하던 엄청난 만남의 가능성이 장난으로 비로소 현실화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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